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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라이프(2006), 유실의 풍경, 정지된 삶 “흐르는 강, 떠나는 사람들” 스틸 라이프는 중국 산샤(삼협) 지역을 배경으로, 두 인물의 교차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하나는 광산 노동자 한산밍, 다른 하나는 간호사 셴홍. 이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이 지역에 도착하지만, 공통적으로 과거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채 흐르는 강가에 선다. 한산밍은 16년 전 헤어진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셴홍은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이들의 여정은 삼협댐 건설로 인해 수몰 예정인 도시 펑제(奉节)를 배경으로 진행되며, 도시가 하나씩 무너져가는 풍경 속에서 인간관계의 무너짐과 재건을 병치시킨다. 한산밍은 무뚝뚝하고 과묵한 남성이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시선에는 가족을 향한 조용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는 다시 만난 아내에게 양육비를 주고.. 2025. 4. 11.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흑백의 시선, 사랑의 몽환 "파리의 밤, 두 영혼이 흐르다" 는 줄거리의 틀을 빌리고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밤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한 청년 ‘알렉스’와 고독에 휩싸인 여인 ‘미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만남’과 ‘사랑’이라는 서사를 택하면서도, 그 안에 뚜렷한 갈등이나 변화보다는 감정의 흔들림을 중심에 둔다. 알렉스는 예술가 지망생으로, 연인에게 차인 후 삶의 의미를 잃고 도시를 떠돈다. 그는 마치 고장 난 녹음기처럼 과거의 기억을 반복하고, 파리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걸으며 시간을 맴도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미리는 겉보기에는 차분하지만, 그녀 또한 똑같은 공허함을 안고 있다. 그녀는 현재의 연인과도 단절감을 느끼고, 무.. 2025. 4. 10.
영화 타르(TÁR, 2022), 지휘봉 아래의 그림자 완벽한 거장의 이면 – 리디아 타르의 초상타르(TÁR)는 한 인물의 몰락을 다룬 영화이지만, 동시에 그 인물이 ‘왜’ 무너졌는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주인공 리디아 타르가 단순한 악인이 아닌, 강렬한 재능과 권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 최초의 주요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이자, 현대 클래식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가진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기보다는, 그 업적 아래 숨겨진 심리적 불안, 권력의 중독, 그리고 관계의 파열을 탐색한다. 이 점에서 리디아 타르는 단지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권력과 예술이 얽힌 ‘구조’ 자체를 인격화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리디아는 완벽주의자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지만, 그 모든 위엄.. 2025. 4. 10.
영화 브로커(2022) "버려진 것들로 이룬 가족의 초상" "가족의 이름으로" 줄거리와 인물관계의 윤곽브로커는 ‘베이비 박스’라는 현실적인 사회 장치를 중심으로, 아이를 사고파는 남자들과 그 아이의 생물학적 엄마가 함께 여정을 떠나며 점차 가족 같은 정서를 형성해 나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겉보기엔 단순하다. 아이를 팔기 위해 만난 이들이 서로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열며, 결국 자신들도 모르게 가족을 이루게 된다는 로드 무비 형식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틀 안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녹아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회에서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아이를 유기한 엄마 소영, 고아원 출신의 세탁소 직원 상현, 그리고 함께 일하는 청년 동수는 모두 상처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2025. 4. 10.
영화 우리들(2016),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여름 선이의 시선으로 본 관계의 시작은 여름방학을 앞둔 초등학교 4학년 선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열어간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선이는 반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된 존재다. 영화는 그녀의 외로움을 거창한 설명 없이, 점심시간의 고요한 식판 소리와 혼자 있는 운동장으로 묘사한다. 그런 선이에게 하나라는 이름의 전학생이 다가오며 두 아이는 조심스럽게 친구가 된다. 선이에게 하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준' 사람이었고, 하나에게 선이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안전하게 기대어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아이들 특유의 솔직함과 서툶이 뒤섞인 모습으로 시작된다. 서로의 집을 오가고, 비밀을 나누고, 다정하게 웃는 장면들은 마치 긴 방학을 함께 보낼 동맹을 맺은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관계는 여름이 깊어.. 2025. 4. 9.
이니셰린의 밴시(2022) “고요한 섬, 부서진 우정” 단절로 시작된 내면의 전쟁영화 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갈등에서 출발한다. “그냥 네가 지루해서”라는 한마디로 친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콜름의 선언은, 파드릭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파국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건은 사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단절의 감정을 강력하게 상징한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관계 안에서 어떤 균형을 이뤄야 하는지를 질문하며, 친밀함과 고독 사이에서 인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치밀하게 묘사한다. 콜름은 단순히 관계를 끊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유한함 속에서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바흐처럼 기억될 음악을 작곡하며 ‘영원’을 남기고 싶어 한다. 반면 파드릭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선량함’이 가장 중요하.. 2025.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