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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2022) “고요한 섬, 부서진 우정”

by nonocrazy23 2025. 4. 9.

이니셰린의 밴시(2022) “고요한 섬, 부서진 우정”
이니셰린의 밴시(2022)

단절로 시작된 내면의 전쟁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갈등에서 출발한다. “그냥 네가 지루해서”라는 한마디로 친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콜름의 선언은, 파드릭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파국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건은 사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단절의 감정을 강력하게 상징한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관계 안에서 어떤 균형을 이뤄야 하는지를 질문하며, 친밀함과 고독 사이에서 인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치밀하게 묘사한다. 콜름은 단순히 관계를 끊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유한함 속에서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바흐처럼 기억될 음악을 작곡하며 ‘영원’을 남기고 싶어 한다. 반면 파드릭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선량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들의 충돌은 결국 삶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충돌이며, 두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정체성, 존재의 목적, 나아가 시간에 대한 감각의 차이로까지 확장된다. 감정의 균열은 점점 격해지고, 콜름은 파드릭이 계속 말을 걸 경우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극단적인 선언까지 한다. 이는 곧 감정적 폭력이 신체적 폭력으로 옮겨가는 심리의 외화(外化)를 상징하며, 관계의 단절이 얼마나 사람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그 단절이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균열을 내는 ‘정체성의 붕괴’ 임을 끈질기게 묘사한다. 파드릭은 점점 자신이 믿었던 ‘선량함’이라는 가치를 상실하고, 분노와 복수심에 물들어간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좋은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잔인함을 선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갈등의 시작이 폭력도, 배신도 아닌 그저 “관계를 그만두겠다”는 말 한마디라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있음’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또 그것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틀릴 수 있는지를 영화는 고요하게 그러나 무섭도록 명확하게 보여준다. 말보다도 무거운 침묵, 이해받지 못한 감정, 반복되는 거절은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렇게 작고 조용한 시작을 통해, 거대한 감정의 전쟁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내전의 은유와 인간 소외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 내전이 한창이던 1923년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는 그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총성과 포격음,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신문 기사나 대사들을 통해 전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이처럼 감독 마틴 맥도나는 내전을 ‘화면 밖’에 두는 대신, 그와 동일한 내적 분열을 섬 안의 인물들 사이에 투영시킨다. 결국 이 작품은 "외부 전쟁"보다 더 근본적이고 파괴적인 "내면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콜름과 파드릭의 관계는 명백하게 아일랜드 내전의 축소판이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고, 오랫동안 함께였지만 어느 날 돌연한 이념과 감정의 차이로 인해 갈라선다. 콜름은 새로운 창조와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지만, 파드릭은 과거의 평온과 일상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이 충돌은 곧 역사 속 내전의 형제살인 구조, 즉 "같은 민족, 같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끔찍한 단절과 파괴"를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둘 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고 끝내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치닫는다. 영화 후반부, 콜름이 자른 손가락들, 불타버린 집, 그 이후에도 지속되는 서로에 대한 침묵은 전쟁의 무의미함과 끝나지 않는 상처를 상징한다. 흥미로운 건 둘 다 상대를 완전히 죽이지 않는다. 서로가 고통스럽게 공존하며 살아남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종결되지 않는 전쟁’, 즉 정체된 고통의 상태를 은유한다. 이런 식의 접근은 일반적인 전쟁 영화와는 차별화되며, 전쟁의 직접적 참상보다 더 뼈아픈 인간 내면의 파괴와 고립을 조명한다. 또한 이 섬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일상은 느릿하고, 대화는 반복되며, 유일하게 소통의 가능성을 지녔던 파드릭의 여동생 시오반마저 떠난다. 시오반은 아마 이 섬에서 유일하게 변화와 성장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부재 이후 파드릭은 완전히 혼자가 되며, 영화는 내면의 고립, 사회적 소외, 정체성 상실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그의 심리 안에 심어 넣는다. 이처럼 영화는 특정 사건을 묘사하지 않고도,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분열되고, 서로를 파괴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조용한 풍경 속에 담아낸다. 결국 <이니셰린의 밴시>는 “내전의 소음” 대신 “고립된 마음의 비명”을 택한 영화다. 갈등의 본질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단절, 이해받지 못한 순간, 그 작고 조용한 틈에서 전쟁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서로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만 했을까?”

 

마틴 맥도나 감독의 연출과 풍경의 힘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정적(靜寂)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 영화는 대사보다는 침묵, 사건보다는 정서, 속도보다는 정체된 분위기로 관객을 천천히 침잠시킨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이야기 자체의 비극성과 맞물려, 관객이 단순한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에 직접 호흡하게 만든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고요하고,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긴장과 서늘한 파열의 기운이 깔려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건 풍경 자체의 활용이다.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은 거칠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람 부는 절벽, 비 내리는 들판, 적막한 바다. 이 모든 풍경은 ‘외로움’과 ‘고립’을 시각화한다. 이곳은 탈출구가 없는 감정의 감옥이며, 그 속에 갇힌 인물들은 마치 서로를 마주 보며 천천히 침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맥도나는 이 풍경을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확장된 공간으로 사용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두 번째는 리듬의 미학이다. 맥도나는 이야기 전개에서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거부한다. 대신 장면의 반복, 미묘한 변주, 의도적인 정지 상태를 통해 현실적인 삶의 감각을 구현한다. 일상의 단조로운 루틴이 감정의 곤두섬으로 바뀌는 과정은 아주 서서히 이뤄지고, 이는 마치 감정이 마음속에서 퍼져나가는 속도 그대로를 반영한다. 이처럼 극적인 장면 없이도 극적인 감정을 형성해내는 그의 연출은 정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서사를 일으키는 예술에 가깝다. 또한 중요한 요소는 침묵과 여백이다. 인물들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지만,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강한 울림을 준다. 콜름의 집 안, 파드릭의 혼잣말, 시오반의 눈빛 속에는 각자의 상처와 결핍이 깊숙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들에선 카메라가 오래 머문다. 이 응시의 시간은 단순한 감정 전달을 넘어, 감정 자체를 호흡하도록 관객을 초대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연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블랙코미디적 정서다. 손가락을 자르고, 집을 불태우고, 나뭇가지에 밴시(죽음을 예언하는 요정)의 이미지가 걸리는 순간들 속에는 기묘한 유머와 절망이 공존한다. 이 긴장된 아이러니는 맥도나 특유의 스타일로,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과 비극 사이에서 불편한 감정의 진폭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현실에서도 슬픔과 부조리는 늘 공존한다는 감독의 철학을 반영하는 방식이다. 풍경이 감정을 말하고, 침묵이 갈등을 말하며, 여백이 절망을 속삭인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처럼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감정을 이끌어내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관통한다. 그 침묵의 연출이 이 영화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