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거장의 이면 – 리디아 타르의 초상
타르(TÁR)는 한 인물의 몰락을 다룬 영화이지만, 동시에 그 인물이 ‘왜’ 무너졌는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주인공 리디아 타르가 단순한 악인이 아닌, 강렬한 재능과 권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 최초의 주요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이자, 현대 클래식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가진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기보다는, 그 업적 아래 숨겨진 심리적 불안, 권력의 중독, 그리고 관계의 파열을 탐색한다. 이 점에서 리디아 타르는 단지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권력과 예술이 얽힌 ‘구조’ 자체를 인격화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리디아는 완벽주의자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지만, 그 모든 위엄 뒤에는 두려움과 위선, 조작과 억압이 숨어 있다. 그녀는 젊은 여성 음악가를 은근히 조종하거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를 은밀하게 배제하려 하며, 외부의 시선엔 철저히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을 유지한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권력자의 ‘이중성’을 은유한다. 특히 여성 지휘자로서 남성 중심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남성 중심 권력의 언어와 방식을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모순적 얼굴을 모두 지닌다. 흥미로운 건,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뚜렷하게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은 그녀의 천재성과 얄팍한 위선을 동시에 목격하면서도, 선뜻 어떤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이는 케이트 블란쳇의 놀라운 연기와 더불어, 토드 필드 감독이 인물의 모순성을 감정적 극단 없이 묘사하는 방식 덕분이다. 그녀는 예술적 리더로서 누구보다 고결해 보이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권력의 구조 속에서 서서히 자멸해 가는 인물로 완성된다. 이 지점이 바로 타르가 단순한 스캔들 드라마가 아닌, 복잡하고 깊은 심리극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또한 리디아 타르는 시대와 맞물려 해석된다. 그녀의 몰락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실수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화하는 감수성과 규범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그녀의 권위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통해, 어떤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기준의 도래를 암시한다. 결국 타르는 “누가 지휘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단지 무대 위에서의 ‘지휘’가 아닌, 사회와 예술, 관계 속에서 목소리와 힘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예술과 윤리,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타르는 단순한 전기 영화도, 스캔들을 재현하는 드라마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예술가의 도덕성은 예술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간 철학적 작품이다. 리디아 타르의 천재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녀는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지식과 해석력을 지녔고, 음악에 대한 예리한 감각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며 그녀의 권력 남용, 성적 조작, 냉혹한 인간관계가 서서히 드러날 때, 관객은 불가피하게 그 천재성에 대해 윤리적 판단의 필터를 씌우게 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관객을 도덕적 판단의 심판자 자리에 앉히면서도 그것이 쉽게 정리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르가 젊은 제자들을 평가하고,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장면은 분명 권력의 오남용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단순한 가해자 서사로 읽히지 않는다. 그녀 역시 음악계라는 냉정한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라는 현대적 이슈와도 맞닿아 있다. 타르는 특정 인물의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 잘못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영화다. 특히 영화 중반부, 줄리아드 강의 장면은 이 주제를 명확히 드러낸다. 타르는 젊은 학생이 바흐의 삶을 이유로 그의 음악을 거부하는 태도에 분노한다. 그녀는 예술의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영화는 이 입장이 정말 정당한지에 대해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는다. 관객은 오히려 타르의 설득이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장면은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이 과거의 잘못이나 성향으로 인해 ‘소환’되고 ‘재평가’되는 현상과 정확히 겹쳐진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예술을 창조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가? 여기서 타르는 단순히 예술가 개인의 ‘몰락 서사’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한 시대의 권력 구조가 어떻게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어 왔는지를 해체한다. 예술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예술가 또한 도덕의 경계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논의를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 스스로 윤리와 예술의 균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정답은 없고, 판단은 유예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르는 단순한 도덕극을 넘어, 우리 시대의 가장 복잡한 미학적 질문을 품은 문제작으로 자리 잡는다.
연출의 질서와 불협화음
타르는 대사나 줄거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연출 방식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다. 토드 필드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명백히 보여주기보다는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긴장을 유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의 연출은 매우 절제되어 있고, 계산적으로 정제되어 있으며, 그 속엔 깊은 심리적 긴장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영화 전체가 ‘리디아 타르의 시점’과 감정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관객은 그녀의 권위, 고립, 위기, 붕괴를 시각적 리듬 속에서 함께 체감한다. 영화 초반부의 카메라 워킹은 일정한 거리와 질서를 유지하며 타르의 완벽한 삶을 반영한다. 롱테이크와 고정된 쇼트는 그녀가 통제하고 있는 세계를 묘사하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타르의 세계를 ‘관찰자’로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사건이 전개될수록 이 시각적 통제는 서서히 흔들린다. 카메라는 타르의 심리적 균열에 따라 더욱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거울이나 유리창, 그림자 등 왜곡된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하며 그녀의 내면 혼란을 시각화한다. 이런 변화는 뚜렷한 설명 없이도 타르의 심리 상태가 무너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만든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놀랍도록 정교하다. 음악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타르는 ‘음악을 감상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음악이 사라질 때의 정적, 그리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주목하게 만든다. 예컨대, 그녀가 혼란에 빠질수록 어디선가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 문 두드림, 기괴한 리듬은 불안의 정체로 다가오며, 관객에게 마치 스릴러 같은 긴장감을 준다. 이건 외부 세계의 압력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낸 무의식의 공포다. 특히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의 시각적 전환은 충격적일 정도로 상징적이다. 카메라는 화려한 공연장이 아닌 전혀 다른 지형으로 우리를 데려가며, 타르의 몰락 이후 그녀가 마주한 새로운 ‘무대’의 본질을 암시한다. 편집 또한 흥미롭다. 이 영화는 많은 장면에서 인과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결과를 뚜렷이 설명하기보다, 중첩되고 생략된 서사 속에서 관객이 직접 조합하게 만든다. 이는 타르의 시선과 기억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연출 방식이다. 관객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누락한 공백을 추측하게 되며, 이는 오히려 타르를 더 깊은 몰입의 영화로 만든다. 결국 토드 필드의 연출은 탁월하게 음악적이다. 하나의 악장이 다른 악장으로 이행하듯, 영화의 장면 구성과 정서의 변화는 리듬을 갖고 있다. 그 리듬이 정확히 맞춰진 협주곡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타르는 연출적으로도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그 완벽 아래 존재하는 균열과 불협화음까지 포착하는 섬세한 작품이다. 리디아 타르의 지휘는 멈췄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낸 질문과 감정은 관객의 내면 깊숙이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