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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여름의 끝, 사랑의 시작” 한여름의 만남과 감정의 파동1983년, 북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 매년 여름이면 고고학 교수인 엘리오의 아버지는 대학원생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연구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 해의 초대 손님은 미국에서 온 24살의 박사과정 학생 올리버. 17살 소년 엘리오는 처음엔 올리버를 경계하며 관찰하지만, 점차 그에게 이끌리게 된다. 영화는 엘리오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여름의 풍경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미묘한 긴장과 감정의 흐름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보다는 감정의 진폭과 변화에 집중한다. 처음엔 나이 차이와 사회적 거리감 때문에 서로를 쉽게 넘보지 못하던 두 사람은, 점차 여름의 열기와 함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엘리오는 자신의 욕망에 당황하고, 올리버는 차분하게 거리를 유지하려.. 2025. 4. 14.
영화 팜 스프링스(2020) “반복 속에 피어난 진심” 무한 반복의 하루 "정체성과 관계의 재발견"영화는 캘리포니아의 사막 한복판, 팜스프링스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나일스는 이미 수많은 시간을 이 결혼식장에서 보내온 인물로, 매일같이 같은 하루를 반복 중이다. 그는 과거의 선택이나 미래의 가능성에 관심이 없어진 채, 유쾌한 허무주의 속에서 루프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신부의 언니인 사라가 우연히 동굴에 들어오면서 똑같은 하루에 갇히게 되고, 두 사람은 이 비현실적 상황을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단순한 SF 설정을 넘어선다. 타인과의 ‘공동 루프’라는 설정을 통해, 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어가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일스는 처음에는 사라를 루프의 동반자로 여길 뿐 감정적으로 벽.. 2025. 4. 13.
영화 윈터 슬립(2014) "겨울의 침묵, 내면의 메아리" 캅파도키아의 설경 아래윈터 슬립의 배경은 터키의 캅파도키아. 마치 달 표면처럼 생경하고 고요한 풍경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정서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하나의 인물이자 거대한 감정의 무대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인공 ‘아이딘’은 배우 생활을 접고 작은 호텔을 운영하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중년의 남성이다. 그와 함께 사는 인물은 그의 젊은 아내 니할, 그리고 여동생 네즐라. 겉으로 보기엔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이 세 인물은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외롭고, 침묵 속에 갇혀 있다. 줄거리는 거창한 사건 없이 일상의 대화와 충돌로 진행된다. 가장 중심이 되는 갈등은 아이딘이 가진 자기 중심적인 삶과 위선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는 자신이 지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지만, 주변 인물들은 점점 그 허.. 2025. 4. 13.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 영혼의 리듬 하바나에서 되살아난 목소리 1990년대 중반, 미국의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Ry Cooder)는 전설로 남아 있던 쿠바 음악의 보물들을 발굴해 새로운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쿠바의 수도 하바나로 향해, 거기에서 자신조차 놀랄 만큼 믿을 수 없는 재능을 지닌 원로 음악가들을 하나둘 찾아낸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음악을 시작한 전설적인 노인들이다. 오마라 포르투온도, 이브라힘 페레르, 콤파이 세군도, 루벤 곤잘레스, 엘리아데스 오초아 등 이 음악가들은 대부분 70~90세에 가까운 고령이었지만, 음악 안에서는 여전히 젊고 뜨겁게 살아 있었다. 영화는 그들의 삶과 음악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손끝과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감동적이지만, 동.. 2025. 4. 12.
영화 애프터썬(2022), 햇살 아래 잃어버린 아버지 기억의 틈에서 바라본 아버지애프터썬은 단순한 ‘아버지와 딸의 휴가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얼마나 섬세하게 구조화된 기억의 재구성인지 드러난다. 영화의 표면적인 서사는 열한 살 딸 ‘소피’와 젊은 아버지 ‘캘럼’이 터키의 한 리조트에서 함께 보낸 여름휴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회상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조심스레 쌓여간다. 성인이 된 소피가 오래된 캠코더 영상과 기억 속 이미지를 조합하면서 떠올리는 그 여름은, 명확하고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라 불완전한 파편들의 조합이다. 이 영화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기보단 감정과 이미지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감독 샬롯 웰스는 “기억이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냄새, 빛, 감정, 그리고 찰나의 이미지로 남는다.”는 방식으로 서사를 쌓.. 2025. 4. 12.
하얀 풍선(1995, 자파르 파나히) “작은 여정, 큰 세상” 단순한 줄거리 속에 담긴 상징적 구조하얀 풍선은 이란의 설날, 노루즈 전날을 배경으로 한 어린 소녀 라지에가 금붕어를 사러 가는 단 하루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무척 단순하다. 라지에는 엄마에게 금붕어를 사기 위한 돈을 받고, 시장으로 가는 도중 돈을 잃어버리고, 그 돈을 되찾기 위해 거리의 여러 인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아동극이나 일상극이 아니다. 영화는 이 짧은 여정을 통해 이란 사회의 다양한 단면들, 그리고 인간과 사회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따뜻함을 정교하게 드러낸다. 우선 눈여겨볼 지점은 '아이의 시선'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금붕어는 이란 설 풍습에서 복과 생명을 상징하는 존재인데, 그를 사기 위한 여정이 곧 아이의 성장과 감.. 2025.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