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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썬(2022), 햇살 아래 잃어버린 아버지

by nonocrazy23 2025. 4. 12.

영화 애프터썬(2022), 햇살 아래 잃어버린 아버지
애프터썬(2022)

기억의 틈에서 바라본 아버지

애프터썬은 단순한 ‘아버지와 딸의 휴가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얼마나 섬세하게 구조화된 기억의 재구성인지 드러난다. 영화의 표면적인 서사는 열한 살 딸 ‘소피’와 젊은 아버지 ‘캘럼’이 터키의 한 리조트에서 함께 보낸 여름휴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회상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조심스레 쌓여간다. 성인이 된 소피가 오래된 캠코더 영상과 기억 속 이미지를 조합하면서 떠올리는 그 여름은, 명확하고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라 불완전한 파편들의 조합이다. 이 영화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기보단 감정과 이미지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감독 샬롯 웰스는 “기억이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냄새, 빛, 감정, 그리고 찰나의 이미지로 남는다.”는 방식으로 서사를 쌓는다. 그래서 영화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단절, 혹은 반복되는 사소한 대화 속에서 묘한 감정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한 장면에서 소피가 수중카메라로 아버지를 찍다가 물속에서 사라지는 장면, 거울 속 두 사람의 엇갈린 시선, 어른이 된 소피가 플래시백처럼 떠올리는 아버지의 뒷모습 등은 모두 기억의 파편들이 불완전하게 재생되는 방식으로 연출된다. 영화에서 결정적인 구조적 장치는 캠코더 영상이다. 이 아날로그 기록은 그 당시에는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장면들이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소피는 아버지를 기록했지만, 그 기록조차 아버지의 고통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카메라는 있었지만, 진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눈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기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기억을 다시 보며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또한 영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가 자유롭게 교차하는 구조도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두운 클럽에서의 몽환적 장면, 아버지와 딸이 껴안고 춤추는 순간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로 있었던 장면일 수도 있고, 소피가 지금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서적 진실성을 높이는 장치다. 어떤 기억은 더 명확해지고, 어떤 감정은 더 흐려지며, 과거의 어떤 순간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결국, 애프터썬은 줄거리의 완결보다는 감정의 잔류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딸의 시선을 통해 천천히 감정을 배치하며, 관객이 스스로 그 틈을 해석하도록 만든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단지 슬픈 휴가의 추억이 아니라, 삶과 상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기억의 초상화로 완성된다.

 

사라짐과 사랑 사이

애프터썬이 정말 특별한 이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슴 깊숙이 울리는 감정의 공백을 전한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딸 소피가 아버지 캘럼과 보낸 평범한 듯한 여름휴가를 다루지만, 그 안에 내재된 감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감독 샬롯 웰스는 삶 속에서 가장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 즉 사랑, 무력감, 슬픔, 그리움, 부채감을 정교하게 수면 아래에 배치해 놓는다. 이 영화는 말보다 침묵이, 설명보다 간격이, 드라마보다 잔상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상실'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그 감정이 영화 전체에 퍼져 있다. 캘럼은 분명 사랑하는 딸과 시간을 보내지만, 계속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듯한 외로움과 피로감을 보인다. 그는 다정하고 인내심이 있지만, 틈틈이 정신적 탈진 상태를 드러낸다. 소피는 어린 나이에 그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성인이 된 후 그것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가족의 추억을 넘어서, 세대 간 이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말한다. 이 영화가 가장 절묘한 감정선을 만드는 순간들은, 오히려 '사라짐'에 관한 묘사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캘럼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거울에 비친 채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 클럽에서 아버지와 딸이 껴안고도 닿지 못하는 듯한 춤. 이런 장면들은 모두 감정의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중 구조를 가진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전하는 방법을 모를 때, 우리는 때로 서로를 잃는다. 캘럼은 그 사랑을 끝까지 표현하려 애쓰지만, 자신의 무너짐을 감출 수 없고, 소피는 그 조짐을 너무 늦게 알아챈다. 이런 사랑과 상실 사이의 미묘한 간극이 영화의 핵심 정서다. 또한, 영화는 딸의 시선에서 보이는 아버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불가해함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어린 소피에게 아버지는 듬직한 존재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연약하고 외로우며, 자신과도 타협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는 관객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 사람의 슬픔은 결국 그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결국, 애프터썬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관객이 자신의 기억 속 사랑과 상실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자신의 아버지를, 또 다른 누군가에겐 어릴 적 자신을 떠올리게 만들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애프터썬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이거다! 우리는 누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하고, 놓치고, 그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

 

빛, 리듬, 그리고 거리두기

샬롯 웰스는 애프터썬에서 형식이 감정을 대변하는 방식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구현한다. 그녀의 연출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한 장면 한 장면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은밀하게 포착해낸다. 웰스가 사용하는 가장 두드러진 장치는 거리 두기다. 이 영화는 가까운 사람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시각적 거리감으로 구체화한다. 많은 장면에서 인물은 화면의 중심에 있지 않거나, 프레임 바깥에 위치해 있다. 혹은 거울이나 창문, 물 속이라는 장벽 너머로 포착되기도 한다. 이 공간적 거리감은 결국 정서적 거리감과 겹쳐지며, 관객에게도 그 인물의 고립을 체감하게 만든다. 촬영 감독 그레고리 오케가 이끄는 카메라는 흔들림 없이 정적인 구도를 자주 유지한다. 인물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그들이 그저 존재하게끔 두는 시선을 고수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감정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이 거리감은 냉정함이 아니라, 존중에 기반한 거리다. 고통받는 캘럼에게 조명을 들이대는 대신, 그의 그림자와 뒷모습, 머뭇거리는 손짓을 통해 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마치 소피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존재하지만 결코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슬픔을 형상화한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치는 빛과 색의 연출이다. 따뜻한 햇살, 물결 위로 반사되는 빛, 붉은 조명이 가득한 클럽 장면 등은 감정의 무게와 결을 시각적으로 확장시킨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클럽 장면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기억의 가장 깊숙한 층위로 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만든다. 소피와 캘럼이 껴안고 춤추는 장면은 그들의 감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교차하는 환상적 순간이며, 동시에 마지막 이별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감정의 정점을 시각적으로 터뜨리는 한편, 슬픔이 어떤 빛 아래선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음악도 연출의 핵심적인 도구다. Under Pressure가 흐르는 클라이맥스는 단순한 사운드트랙을 넘어, 감정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지점에서 음악이 감정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감정이 결집된 순간이자, 웰스 감독이 언어 대신 음악과 영상으로 감정을 완성하는 방식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또, 캠코더의 저해상도 영상과 필름의 부드러운 질감을 교차해 배치하는 등, 영화는 기억의 매체성과 정서적 온도차까지도 치밀하게 고려한다. 샬롯 웰스는 이 한 편의 데뷔작으로, 감정을 서사나 대사 없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능력, 그리고 관객을 감정의 깊이에 몰입시키는 리듬감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증명해 냈다. 그녀의 연출은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오래도록 남는 조용한 흔들림을 선사한다. 애프터썬은 그렇게, 형식과 감정이 가장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빛나는 기억의 풍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