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2002), 전쟁 속 침묵과 음악의 기억
침묵의 생존: 연기하지 않는 인간《피아니스트》는 전쟁영화지만, 이 영화는 전통적인 전쟁영화에서 기대되는 긴장감이나 영웅적 내러티브, 극적인 전환을 거의 거부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극도의 절제된 시선과 침묵 속에서 인간 존엄과 생존의 윤리를 다룬다. 그 중심에는 실제 인물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이 있고, 그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저항도, 반격도, 심지어 말조차 하지 않은 채 존재를 지속한다. 그 침묵은 수동성이나 무기력이 아니라, 폴란스키가 만들어낸 가장 강렬한 생존의 미학이다. 슈필만은 영화 내내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보다 반응을 통해 움직이고, 주체라기보다 주변 환경..
2025.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