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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메테우스, 창조와 파괴의 기원을 묻다

by nonocrazy23 2025. 5. 19.

영화 프로메테우스, 창조와 파괴의 기원을 묻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

신을 찾아 떠난 여정: 인간 기원의 질문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는 겉보기에는 외계 탐사를 다룬 SF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훨씬 더 깊은 철학적 질문, 즉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를 만든 존재는 왜 우리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중심에 둔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은 이 영화를 통해 기술적 미래와 고대 신화,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를 단순한 주제의 장식이 아닌 서사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시킨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쇼 박사(누미 라파스)는 이 질문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인물이며, 그녀의 존재는 과학자의 이성적 호기심과 종교적 믿음이 갈등 속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엘리자베스는 단지 과학적 탐사대원이 아니라,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신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품고 살아온 신앙적 주체다. 그녀가 “나는 여전히 믿어요”라고 말하는 순간은,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음과 동시에, 인간이 아무리 우주를 탐사해도 본질적으로는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녀의 여정은 외계 문명을 향한 기술적 탐사라기보다, 기원에 대한 존재론적 회귀에 가깝다. 이는 프로메테우스호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신의 불을 훔친 자의 운명을 따라가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자 비극의 반복이다. 반면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는 인공지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창조자인 인간에게서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묻고, 동시에 인간이 왜 신을 찾는지 조롱한다. “왜 우리를 만들었는가?”라는 인간의 질문은, 데이비드가 인간에게 품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 구조는 영화가 신-인간-기계라는 삼중 구조를 통해, 창조와 존재의 연속된 사슬 속에서 하위 존재가 상위 존재를 이해하려는 구조적 반복을 보여주는 방식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절대자의 위치에 있지 않고, 단지 또 하나의 조작된 결과일 뿐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설교나 대사로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시각적 은유와 공간 구조로 배치한다. 엔지니어의 구조물은 신전처럼 장엄하지만 차갑고 비인격적이며,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단순한 실험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해 온 신, 즉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넘치는 창조자 이미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호의 탐사는 신을 찾는 여정이라기보다, 신이라는 개념이 붕괴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때 ‘신’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품어온 질서와 목적에 대한 기대를 상징하며,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해답을 주지 않는 영화이며, 오히려 질문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동료가 죽고, 인류가 자신을 창조한 존재로부터 아무 의미 없는 파괴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묻는다. “왜?” 그리고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더 먼 우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신을 해체한 이후에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상하며, 그 자체로 영화의 결론이자 철학적 선언이 된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와 과학, 창조와 파괴, 이성과 신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존재의 근본을 되묻는 영화다. 이 작품은 신을 찾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을 버리고도 인간이 질문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이 놓여 있으며, 그 질문은 단지 이야기의 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탐사의 시작이자 본질이다.

 

차가운 우주, 차가운 창조자: 미장센과 존재 철학

이 영화가 창조자와 피조물, 인간과 비인간, 기원과 종말 사이의 거대한 질문을 감정이 아니라 감각으로 전달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의 미장센이 지닌 존재론적 전략 때문이다. 스콧은 이 영화에서 우주를 생명과 연결된 공간이 아닌, 감정도, 목적도 없는 무심한 질서의 차원으로 재구성하며, 관객에게 극단적으로 차가운 시청각 경험을 강요한다. 이러한 차가움은 단지 공포를 유도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라, ‘창조자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철학의 시각적 구현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색채의 사용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이 도달하는 공간, 즉 엔지니어들의 유적지와 구조물은 전형적인 생명색조(붉은 톤, 따뜻한 광원, 유기적 곡선 등)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대신 회색, 흑색, 푸른빛을 띤 무채색 계열이 지배하며, 금속성과 돌기의 촉각적 거칠음이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저장하거나 기억을 봉인한 구조물처럼 기능하며,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창조자의 본질(비정서적, 비인격적, 비의적 존재)를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인간이 상상하는 신은 보통 자애롭거나 위엄 있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 영화의 창조자는 정적이고 감정이 없으며, 스스로의 창조물을 파괴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기계에 가까운 존재성을 지닌다. 이러한 창조자의 비인격성은 공간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스콧은 영화 전체를 통해 대칭성과 반복, 수직적 위계의 공간 구조를 활용한다. 구조물은 거의 예외 없이 인간보다 거대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그 구조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 들어가며, 카메라는 종종 이를 하이 앵글로 내려다본다. 이러한 구도는 인간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항상 ‘관측되는 존재’이자 ‘침입자’ 임을 강조하며, 이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해체적 시선이다. 특히 구조물 내부의 구형 홀, 검은 액체가 흐르는 수조, 거대한 엔지니어의 석상 등은 신전이라기보다 실험실 또는 묘지에 가깝게 느껴지며, 생명과 숭고의 장소라기보다는 차가운 기능성만을 담보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사운드 또한 이러한 비정서적 세계를 공고히 한다. 영화는 전통적인 SF의 서사음악을 거의 배제하고, 금속성 충격음, 저주파 진동, 기계음에 가까운 드론 사운드를 배치하여 공간을 감정이 없는 기계적 환경으로 만든다. 이는 단지 음향적 선택이 아니라, 이 우주에는 인간의 감정을 수용해 줄 장치가 없다는 철학적 전언이자, 관객이 정서적 동일화 대신 이성적 소외를 느끼도록 유도하는 구조이다. 특히 창조자와의 첫 대면에서 감정적 음악 대신 정적과 비정상적 음향만이 흐르는 점은, 인간이 그토록 열망하던 ‘기원의 신’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또한 ‘경계의 모호함’을 시각화하는 데 탁월하다. 데이비드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고, 엔지니어는 인간의 창조주이지만 인간보다 더 감정이 없다. 이때 스콧은 디자인적으로 기계와 유기체, 생명과 비생명, 인물과 환경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 뒤섞는 방식을 사용한다. 벽과 인물의 피부가 동일한 질감처럼 보이고, 구조물과 생물체가 구분되지 않는 촬영 방식은 이 세계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은 더 이상 우월함의 기준이 아니라는 시각적 선언으로 작동한다. 그 안에서 관객은 인간, 기계, 신, 괴물이라는 범주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론적 불안정성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프로메테우스》의 미장센은 단지 공간을 꾸미는 수준이 아니라, 영화의 철학적 입장을 감각의 레벨로 침투시키는 장치이다. 우리는 이 영화 속 우주에서 ‘경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이유를 찾으려는 존재의 고독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창조자에 의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지속하는 주체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역설적 깨달음을 시청각적으로 구축한, 깊이 있는 영화적 철학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끝, 질문의 시작 – 파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

《프로메테우스》의 서사는 기원에 대한 탐사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피와 파편, 파괴와 잔해로 가득한 비극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은 이 파괴를 단순한 실패나 재앙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류 문명이 가장 원대한 질문을 품고 출발한 여정의 끝이, 필연적으로 자기 해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묘사하며, 그 파괴 속에서 오히려 진정한 ‘질문의 시작’을 새로이 일으킨다. 영화는 과학적 야심, 종교적 열망, 인간적 집착이 얽힌 복잡한 동기를 하나의 구조 속에 넣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성향을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우주의 끝자락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기원을 만든 존재와 마주하지만, 그 만남은 깨달음이나 교감이 아닌 일방적 폭력과 무관심의 확인으로 끝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창조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역시 인간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그 존재를 만든 이들은 인간의 의미화 자체를 불필요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이 절망적 단절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의미를 강박적으로 부여하려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메타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영화는 인간이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핵심적인 인간성으로 제시한다. 엘리자베스 쇼 박사는 그 모든 파괴와 상실, 배신과 무의미 속에서도 귀환이 아닌 ‘더 깊은 질문’을 향한 탐사를 선택한다.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본능적 욕망 대신, 왜 우리가 만들어졌는지를 묻기 위해 남겨진 우주선을 타고 더 먼 곳으로 향한다. 이 선택은 단지 생존이 아닌 사유의 의지이며, 리들리 스콧은 이 장면을 통해 질문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성의 핵심임을 선언한다. 기원에 대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질문 그 자체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유의 역설이 이 영화의 종결부에 도달한다. 파괴의 주체는 인간이기도 하다. 웨일랜드 기업은 인간의 창조자와 직접 대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탐사를 철저히 ‘자본의 명령’ 아래 조직했고, 그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혼돈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영화는, 인간이 신을 찾는 여정을 기술과 권력으로 포장할 때, 신화는 과학으로 변질되고, 질문은 명령으로 바뀌며, 신은 단지 활용의 대상이 된다는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결국 프로메테우스호의 멸망은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과잉 신뢰가 초래한 자기 파괴적 결말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모든 종말의 이미지 속에서도 《프로메테우스》는 궁극적으로 절망보다 사유, 공포보다 탐구의 욕망을 선택하는 인간의 잔존적 숭고함을 강조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자베스가 우주 속으로 다시 나아가는 그 순간은 침묵과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그것은 신과의 대면이 아닌 신을 재정의하려는 인간의 지적 고집이며, 모든 생명이 파괴된 자리에서조차 ‘왜’를 묻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존재론적 시선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질문이 해답보다 강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며, 신의 부재 혹은 무관심을 확인한 인간이 여전히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으로 사유와 질문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단지 철학적인 SF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위치를 정직하게 묻는 현대 신화로 작동한다. 파괴는 종말이 아니며, 질문은 살아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기에, 영화는 끝이 아닌 시작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