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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신저스, 선택과 고독의 우주 윤리

by nonocrazy23 2025. 5. 20.

영화 패신저스, 선택과 고독의 우주 윤리
패신저스 (Passengers, 2016)

고독한 각성, 비극의 출발점

《패신저스 (Passengers, 2016)》의 서사는 우주선이라는 밀폐된 공간, 인간이라는 존재의 감정적 결핍, 그리고 그 결핍에서 비롯된 윤리적 붕괴를 동시에 다루는 이야기다. 주인공 짐 프레스턴(크리스 프랫)은 하이퍼수면 중 예상치 못한 오류로 인해, 다른 승객들보다 90년이나 일찍 혼자 깨어난다. 이 설정은 단순한 생존 서사나 사랑 이야기의 전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실존적 고립을 극단적으로 구체화한 심리적 실험이다. 짐은 물리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사회적 관계망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정체성의 기반을 잃어가며, 그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고립의 체감은 서서히 짐의 신체적 행동으로 변주된다. 처음에는 루틴한 일상 유지, 대화 상대 없는 식사, 로봇 바텐더 아서(마이클 쉰)와의 반복된 상호작용 등으로 생존을 유지하려 하지만, 이내 그는 정서적 불균형에 빠지고, 자기감정의 방향을 타자 없이 조절할 수 없는 상태로 들어선다. 이는 외로움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고통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확인하는 존재이기에, 누군가로부터 ‘지켜보이고 있다’는 감각이 결여될 때, 정체성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짐의 심리 상태는 결국 자기 존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타자를 강제로 호출하려는 욕망으로 전환된다. 오로라(제니퍼 로렌스)를 깨우기로 한 결정은 우발적이라기보다 필연적이다. 여기서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윤리 이전의 인간 본능, 즉 "존재를 견디기 위해 타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명제를 드러낸다. 짐은 그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가 단지 정서적 결핍이 아닌 존재론적 붕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윤리적 경계를 넘어서서라도 관계를 구성하려는 충동적 선택을 감행한다. 이 장면은 단지 ‘한 여자를 깨운 사건’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기 붕괴를 막기 위한 절박한 구조 요청이며, 영화는 이를 관객으로 하여금 단죄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짐의 선택이 비윤리적임은 분명하지만, 그 결정에 이르게 된 인간의 감정 구조가 너무나 설득력 있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의 고독은 실존적 시험이며, 단순한 생존이 아닌 인간성의 경계 시험이다. 영화는 이 설정을 통해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인간은 무엇을 견디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을 우주라는 새로운 배경으로 옮겨온다. 다만, 물리적 생존만이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의 지속성까지 걸린 생존의 전면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고독은 훨씬 더 깊은 층위의 문제로 발전한다. 특히 짐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오로라를 깨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은, 단순히 ‘윤리적 갈등’이 아니라 인간이 혼자서는 지속될 수 없는 존재라는 문명적 한계의 폭로이기도 하다. 결국 짐의 각성은 이야기의 출발점인 동시에, 영화 전체의 비극 구조를 설계하는 장치다. 이 ‘우연한 깨움’은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감정적 연결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본질적 진실이 고통스럽게 새겨져 있다. 《패신저스》는 이 지점을 통해 사랑과 관계 이전에 ‘고독’이 어떻게 인간을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로 이끄는지를 탐색하며, 그로부터 시작되는 파열의 흐름을 치밀하게 전개한다. 짐의 결정은 용서받기 어렵지만, 그 선택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관계 중심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심리적 도발로 읽힌다.

 

사랑인가 침해인가: 윤리적 딜레마

《패신저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은 짐 프레스턴이 오로라를 깨우는 행위가 사랑의 시작인가, 아니면 자율성에 대한 침해이자 사실상 ‘삶의 납치’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윤리적 정점을 구성하며, 단순히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분해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 심리와 사회적 도덕성의 교차점을 제시한다. 리들리 스콧이 《프로메테우스》에서 질문을 결론보다 중요하게 여겼듯, 모튼 틸덤 역시 이 영화에서 ‘선택의 정당성’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그 판단에 도달하도록 감정의 프레임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영화적으로 설득력 있게 조율되어 있다. 짐은 자신의 선택을 거짓 없이 감정에 기반한 결정으로 인식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은 명백히 다르다. 오로라는 짐의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빼앗긴다.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냉정하게 그 윤리적 구조를 꿰뚫고 있으며, “당신은 나의 삶을 훔쳤어”라는 직설적 대사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도덕적 발언이자, 감정에 흐려지지 않은 윤리의 목소리다. 이 장면은 단순히 짐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행위의 도덕성을 ‘면제’할 수 있는가를 직접 묻는 구조로 설계된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장면을 이후에 일정 부분 감정적으로 무마하면서도, 그 윤리적 꺼림칙함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의 시점은 처음부터 짐에게 고정되어 있다. 영화는 그의 고독을 충분히 경험하게 만든 후에야, 오로라의 각성과 충격을 보여준다. 즉, 감정의 동일화는 짐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의 외로움, 망설임, 절망은 관객의 심리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 이 동일화 전략은 관객이 그 선택을 비난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서적 프레임을 형성하고, 오로라의 분노가 가장 정당해 보일 때조차 짐을 완전히 내칠 수 없도록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윤리적 딜레마를 더욱 증폭시킨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군가의 선택을 덮을 수 있는가? 고립이라는 절망이 누군가의 인생을 침해할 면허가 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영화는 두 인물이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구도를 통해, 감정과 윤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병존시키는 전략을 택한다. 오로라 역시 시간이 흐르며 짐의 선택을 이해하고, 심지어 그와 생을 함께하기로 결단하지만, 이는 용서의 결과라기보다 삶의 조건이 변형된 새로운 현실 수용에 가깝다. 오로라는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했지만, 박탈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인간 존재의 필연과 마주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사랑은 선택이지만, 때로는 선택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도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 《패신저스》는 이러한 복잡한 정서적 레이어를 관객에게 과제로 남긴다. 짐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이 고립된 상태에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취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취약함 자체가 우리 모두의 감정적 공감을 유도한다. 결국 영화는 "그가 틀렸는가?"를 묻는 대신, "당신이 그 상황이라면 정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역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윤리의 핵심이다. 완전한 옳음도, 명확한 그름도 존재하지 않는 그 중간지대에서, 인간은 늘 감정과 판단,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흔들린다. 결국 《패신저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인 선택이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 동시에, 그 선택이 도덕적 일탈이라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지를 탐색하며, 현대적 인간관계의 모순과 정서적 복잡성을 담아낸 윤리적 드라마로 확장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받지 못한 삶과 그 삶을 함께 살아내야 하는 관계의 무게를 묻는, 윤리와 감정이 충돌하는 침묵의 재판정이다.

 

함께 남겨진 자들: 고립 속 관계의 재정의

《패신저스》의 결말은 전형적인 해피엔딩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깊고 복합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두 주인공 짐과 오로라는 더 이상 지구로 돌아갈 수 없고, 항성간 우주선이라는 닫힌 세계 안에서 90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하는 운명적 고립 상태에 놓인다. 이 상황은 단순한 연애 감정이나 감정적 화해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의 재정의를 요구하며,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의 본질을 감정이 아니라 선택과 책임, 지속성과 공존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우주선이라는 공간은 외형상 거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한 사회적 실험실에 가깝다. 기술은 충분히 정교하고 생활은 안락할 수 있지만, 그곳은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실존적 사실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다. 짐은 처음 이 세계에서 절망했고, 오로라는 그에게 구조 요청 없이 소환되었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생존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단순한 로맨틱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사회이자 세계가 되는 관계의 구조적 전환이다. 그들이 택한 공존은 타협이나 감정적 무마가 아니라, 절대 고립이라는 우주적 조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일’을 새로운 삶의 기초로 삼은 선택이다. 특히 우주선 내에 정원을 가꾸고, 아날로그적 흔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진보로 대표되는 냉정한 세계 안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상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한 실용적 선택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감각의 회복, 그리고 그 감각이 관계를 통해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정서적 서사이다. 짐과 오로라는 더 이상 과거의 지구적 인간이 아니며, 이 고립 속에서 ‘인간다움’의 조건 자체를 새롭게 재정립한 존재들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에 도달한다. 인간의 삶은 타자 없이 가능한가? 그리고 자유의지가 결여된 관계는 어떻게 다시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짐의 선택은 오로라의 자유를 침해했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그 침해가 비판을 넘어서 ‘함께 살아가는 조건’을 만드는 새로운 기초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그리고 이 실험의 결과는 ‘사랑의 감정’이 아닌 지속적인 책임의 실천과 공동체의 감각 회복으로 제시된다. 오로라가 짐과 함께하기로 선택한 것은, 그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죽은 후,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 맞이하는 정원과 기록은 그들이 단지 생존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고립된 조건 안에서 인간적인 세계를 창조했다는 증거다. 이는 비극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승리이며, 인간이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관계와 기억, 그리고 생명을 향한 집단적 윤리를 지켜낼 수 있다는 선언처럼 기능한다. 결국 《패신저스》는 사랑이 아니라 공존의 철학을 말한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가 사라진 이후에도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인간적일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이며, 침묵 속의 윤리, 절망 속의 책임, 고립 속의 돌봄이라는 가치를 통해 인간성을 끝내 회복해내는 이야기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