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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드 아스트라, 침묵 속에서 우주를 듣다

by nonocrazy23 2025. 5. 19.

영화 에드 아스트라, 침묵 속에서 우주를 듣다
에드 아스트라 (Ad Astra, 2019)

고립의 우주, 내면의 여행

《에드 아스트라 (Ad Astra, 2019)》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지만, 실제로는 한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관통해 가는 심리극이며, 영화가 끝날 때 관객에게 남는 것은 블랙홀이나 우주선이 아니라,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로이 맥브라이드라는 인물의 고립감과 침묵 속 심리의 결들이다. 로이는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데, 이는 단순한 훈련된 우주비행사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상처와 불안을 외면하려는 방어 기제로 작동한다. 그의 심박수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거의 변하지 않으며, 이는 ‘우수한 우주비행사’라는 평가를 받지만 동시에 ‘감정을 잃어버린 인간’이라는 이면을 드러낸다.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목성 너머 해왕성까지 가는 여정은 사실상 물리적 탐사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지워지지 않은 결핍과 단절의 기억을 향한 내면의 회귀에 가깝다. 어린 로이는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가 국가적 대의를 위해 자신과 가족을 떠났고, 오랫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그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자랐다. 동시에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남성상, 이상적인 우주비행사의 틀 안에 자신을 욱여넣으며, 감정의 억제와 성과 중심의 정체성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해왕성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그는 점차 자신의 내면에서 도려냈던 감정 조각들(외로움, 원망, 사랑, 연약함)을 다시 마주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우주는 단지 배경이 아니라, 로이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투영한 공간적 은유다. 거대한 우주의 진공, 무중력, 소리 없는 움직임은 로이의 감정 상태(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심리, 공허한 일상)과 정확히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우주를 걷는다’는 개념을 곧 ‘자기 내면을 걷는 일’로 치환한다. 로이가 탐험하는 것은 단지 아버지의 흔적이 아니라, 자신이 억눌러온 기억과 감정을 하나씩 복원해가는 고독한 심리적 여정이다. 우주선 내부의 협소한 공간, 외부 소음을 철저히 차단한 사운드 디자인, 단조로운 대사들은 로이의 내면을 시각적·청각적으로 구체화하는 연출 장치로 작동하며, 이를 통해 관객은 물리적으로는 지구와 멀어지지만, 정서적으로는 점점 깊숙이 그의 내면으로 침투하게 된다. 결국 이 여정은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환상을 해체하고 자신의 고립된 자아를 직면하는 과정이다. 그는 해왕성에서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지만, 그 만남은 재회라기보다 관계의 끝맺음이며, 동시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의 시작점이다. 로이는 아버지를 설득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이제 그 누구의 유산도 아닌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귀환을 결정한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돌아오는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정서적 복귀, 인간적 회복, 감정의 재개를 의미한다. 《에드 아스트라》는 이처럼 ‘우주’라는 상징을 통해 현대인이 겪는 감정의 단절과 상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은유한 작품이며, 로이의 여정은 단순한 탐험이 아닌 고립의 시간을 통과한 후 마침내 감정과 관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인간적 복원의 서사로 읽힌다.

 

연출과 미장센의 미학

《에드 아스트라》는 전통적인 우주 영화가 보여주는 장엄한 스펙터클 대신, 우주라는 공간을 감정의 무대로 전환하는 독창적인 시청각 전략을 구사하며, 이는 단지 내러티브의 성격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감독 제임스 그레이가 우주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미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외부를 관찰하는 시선이 아니라, 인물의 주관적 감각과 정서에 밀착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구성은 로이 맥브라이드라는 인물의 내면 풍경을 시각적으로 체화하기 위한 정교한 조형 언어로 작동한다. 색채와 조명의 운용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온도감의 극단적 대비이다. 지구에서부터 달, 화성, 해왕성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따라 화면의 색조는 점점 차갑고 무기질적으로 변화하며, 이는 단순히 거리의 물리적 확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이 외부 세계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초반 지구의 장면에서는 자연광에 가까운 따뜻한 톤이 사용되지만, 달의 표면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화면은 메탈릭 그레이와 창백한 블루 톤으로 전환되고, 화성 기지는 붉은색이지만 오히려 침침하고 폐쇄적이며, 해왕성에 이르면 거의 모든 색채가 사라지듯 무채색에 가까운 암청색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색감의 흐름은 곧 감정의 소실 과정이며, 그 속에서 주인공의 존재는 점점 투명해지고, 오직 의무와 절차만이 남는 인간의 외피로 환원되는 듯한 시각적 인상을 제공한다. 공간의 구성을 보면, 영화는 광활한 우주를 묘사할 수 있는 기술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장면을 폐쇄된 내부 공간, 혹은 프레임이 극도로 제한된 구도로 촬영한다. 우주선 내부, 통신실, 격납고 등 닫힌 구조물 안에서 인물은 지속적으로 카메라의 압박 속에 놓이며, 이는 감정적 폐쇄성과 불통의 시각화로 기능한다. 심지어 외부 우주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인물의 헬멧 안 시점을 사용하거나, 얼굴에 밀착하여 우주를 배경이 아니라 배제된 외부로 처리하고 있으며, 이는 우주의 광활함보다 인간의 내면 감각에 집중하겠다는 미학적 선언과도 같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영화 내내 ‘바라보는 위치’가 아니라 ‘느끼는 위치’에 있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사운드 또한 이 영화의 감정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다. 우주 공간의 무음은 단지 과학적 사실을 반영한 연출이라기보다, 감정을 격리하고 소통을 차단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인물의 내레이션과 극도로 절제된 대사, 그리고 인물 호흡음만이 전면에 배치되는 사운드 디자인은 감정을 외부로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안으로 응축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며, 관객은 인물의 정서에 몰입하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함께 체감하게 된다. 특히 진동처럼 들리는 저주파 배음과, 멀리서 메아리처럼 흐르는 단음의 음악은 인물의 감정이 아닌 ‘감정의 결핍’을 소리로 구성하는 듯한 효과를 주며, 이는 전통적인 영화 음악의 역할과는 반대 방향의 접근이다. 편집 방식에서도 동일한 미학이 이어진다. 영화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빠르게 연결하기보다는, 감정의 여백과 정서적 공백을 길게 유지하는 정적 구조를 택하며, 많은 장면에서 인물의 무표정한 얼굴이나 무중력 속 느린 움직임, 화면의 암전 상태를 수 초 이상 지속함으로써,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리듬을 설계한다. 특히 외부 충돌이나 사건이 발생하는 장면조차도 액션 중심이 아닌 감정 반응의 최소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전통적인 우주영화의 긴장감 대신 정서적 무감각과 심리적 피로감이라는 새로운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결국 《에드 아스트라》의 미장센과 연출 전략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이 시각적 경이로움이나 기술적 진보를 과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고립된 인간의 감정을 외부에 투영해보는 내면적 실험의 장으로 작동한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SF 장르의 전형에서 벗어나, 한 개인의 감정 리듬에 정밀하게 귀 기울이며, 우주라는 가장 먼 공간에서 가장 내밀한 감정을 구축해 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대 우주 영화 중 가장 감각적이고 고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존재, 유대, 귀환의 의미

《에드 아스트라》의 결말은 거대한 서사의 종결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 인간이 침묵의 끝에서 마침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 앞에 고요히 머무는 순간에 가깝다. 영화가 로이 맥브라이드의 여정을 끝맺는 방식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철학적이다. 그는 해왕성의 궤도에서 아버지를 마주하고, 그가 추구해 온 모든 것이 결국 공허한 집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만남은 말의 교환이나 감정의 격렬한 폭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상호 불가능한 이해 속에서의 인정이며,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서적 장면은 용서가 아니라 단절의 수용이다. 로이는 아버지를 지구로 데려오려 하지만,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끝내 스스로 고리를 끊고 자신을 우주로 던진다. 이 장면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한 단절인 동시에, 로이가 오랜 시간 품어온 내면의 허상, 즉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해체이기도 하다. 로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유산 속에 갇혀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아버지의 실패를 스스로의 무게로 짊어지지 않는다. 그는 공허 속에 남겨진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고, 처음으로 그 감정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돌아온다’는 행위를 단순한 귀환의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결단으로 확장시킨다. 로이는 단지 지구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귀환 후, 그는 카페에서 한 여성을 바라보며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감정이 담겨 있고, 타인과 관계를 맺겠다는 의지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이 짧은 장면은 영화 전체의 감정 곡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성으로, 우주에서 돌아온 한 인간이 다시 감정의 세계에 착지하는 순간이다. 이는 곧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 가치, 즉 진짜 발견은 먼 우주가 아니라 곁에 있는 타인에게로 향하는 길에 있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에드 아스트라》는 그렇게 질문한다. “고립된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는가?”, “삶의 목적은 위대한 업적에 있는가, 아니면 사소한 감정에 있는가?”, “멀리 가는 것이 삶인가, 아니면 가까이 머무는 것이 삶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우주는 더 이상 탐험의 대상이 아니라, 고독과 감정의 투사체이며, 그 안에서 인물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 진실(곁에 있는 사람과의 감정적 유대, 인간성의 회복, 실패한 관계의 수용)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로이의 여정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마주하는 길이었고, 위대한 탐험 끝에 도달한 장소는 해왕성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감정의 진실이었다. 그 진실은 외롭고 무겁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을 향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게 《에드 아스트라》는 현대인의 삶과 감정에 대한 정교한 은유로 남으며, 침묵을 뚫고 돌아온 한 인간의 귀환이 단지 임무의 완수가 아닌 감정의 회복, 관계의 재개, 존재의 수용이라는 보편적 귀결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