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향한 여정과 윤정희의 연기
<시>의 주인공 미자는 일상에서는 한없이 평범한, 아니 오히려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인물이다. 나이가 들고, 생계를 위해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손자까지 홀로 키우고 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시를 써보라’는 강좌를 듣고 자신에게 묻는다. “시는 어떻게 써요?” 이 질문은 단지 글쓰기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는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 여정의 시작이자 끝에 선 인물, 미자를 연기한 윤정희의 연기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 하나의 시처럼 느껴진다. 윤정희는 <시>를 마지막 작품으로 선택했고, 그 사실 자체가 이 영화에 깊은 여운을 더한다. 그녀는 16년간의 공백을 깨고 이창동 감독의 손을 잡았는데, 감독은 미자라는 인물에 대해 “가장 평범하고, 동시에 가장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다. 윤정희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연기를 택했다. 대사가 없는 순간,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를테면 손자의 잘못을 알게 된 후에도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꺼내는 장면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내면에서는 삶 전체가 뒤집히는 듯한 무게를 전달한다. 흥미로운 비하인드 중 하나는, 윤정희가 시 낭송 장면에서 직접 쓴 듯한 감정을 담아 연습 없이 촬영에 임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실제 시를 써본 적은 없었지만, 감정에 이입된 상태로 오롯이 미자의 마음으로 그 문장을 읊었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진정성은 그래서 배우가 아니라 ‘미자’라는 사람 자체가 시를 낭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자는 시를 통해 자신이 외면해 온 것들, 즉 손자의 죄, 사회의 무관심, 자신의 무기력함을 하나씩 직시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책임을 짊어지는 선택을 한다. 그녀의 마지막 시는 단지 문장이 아니라 ‘고백’이고, ‘애도’이며, ‘사죄’다. 이 여정은 시를 쓰는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동시에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윤정희의 연기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품고 있어, 관객 스스로 감정을 꺼내보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 의도와 철학
<시>는 제목 그대로 '시'를 중심에 놓지만, 그 시는 단지 문학 형식이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삶의 본질, 특히 ‘윤리적 자각’과 ‘미적 인식’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다. 주인공 미자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하지만, 그녀가 진정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진실’이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으며, 오히려 추하고 불편한 진실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 아이러니를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려 할 때, 동시에 진실도 볼 수 있는가?" 감독은 이 영화가 ‘시를 쓰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를 쓸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특히 미자가 참여한 시 강좌의 첫 장면, 강사는 “시란 본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손자는 친구들과 함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게임을 하고, 어른들은 돈으로 사건을 덮으려 한다. 이창동은 이러한 ‘사회적 맹목’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미자의 느린 각성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하다. 이창동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지는 예술이지, 정답을 주는 매체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는 그 철학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미자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되, 쉽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법적 해결도, 극적인 고발도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요하고 강렬한 윤리적 책임이 자리한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피해자 앞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겠다는 결연함이다. 한편으로 이창동은 미자의 선택이 예술가로서의 첫 걸음이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깨우고,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넘어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창동이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다. 예술은 감정을 일깨우고, 감정은 결국 윤리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시’를 쓸 자격이 있다는 것이 감독의 철학은 한 편의 시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우리에게 닿는다.
촬영비하인드와 미학적 구성
촬영을 맡은 조용규 촬영감독은 이창동 감독과의 오랜 협업을 통해, ‘과하지 않되 감정의 여운을 깊게 남기는 화면’을 구현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미자가 시 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에 지나치는 자연 풍경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강 위에 흐르는 빛의 반사 같은 장면들은 플롯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그녀의 내면이 흔들릴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일종의 ‘감정적 풍경’을 형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미자의 시적 감수성이 깨어나는 과정을 암시하며, 말보다 훨씬 깊은 인상을 남긴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기보다는, 뒤에서 따라가거나 멀리서 바라본다. 이는 미자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보다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려는 태도다. 특히 미자가 마지막 시를 쓰기 위해 강가를 걷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멀찍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암시 없이 지켜본다. 이 거리감은 <시>의 핵심 감정인 ‘고요한 책임’과 깊이 맞닿아 있다. 촬영 현장에서의 흥미로운 비하인드도 있다. 이창동 감독은 종종 현장에서 배우에게 연기에 대한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기보다는, 상황만 설정해 두고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촬영 전에 대사를 다듬거나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는 일이 잦았고, 한 장면을 위해 해 질 녘 자연광을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이는 인위적인 감정보다, 배우의 자연스러운 반응과 현실적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윤정희는 감독이 만들어놓은 이 느린 호흡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았고, 그것이 그녀의 연기를 더욱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음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대신 일상의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 병원 대기실의 웅성임를 통해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이런 무음의 밀도는 시각적 정적과 어우러져 관객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다. 이창동 감독은 “시를 쓸 때,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영화의 정지된 듯한 시공간은 바로 그런 ‘시인의 순간’을 영상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결국 <시>는 카메라, 빛, 공간, 그리고 시간 자체가 하나의 시구처럼 사용된 영화다. 이창동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만큼이나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 빈 공간들은 관객의 해석과 감정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방식은 주제를 과장 없이 드러내되,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시>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미자처럼 비로소 ‘시는 어떻게 쓰는지’를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