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회와 가부장성의 그림자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 세일즈맨은 단순히 부부의 갈등이나 개인적인 복수극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란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억압적인 문화적 구조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 에마드가 아내 라나에게 일어난 폭력 사건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과 지지를 보내기보다는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이 상했다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 같은 반응은 단순한 개인의 미성숙함을 넘어서, 여성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남성 중심의 명예 개념이 강조되는 이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라나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알리는 데 주저하며, 심지어 남편이 가해자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낀다. 이는 단지 범죄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라기보다, 여성이 침묵을 강요받고 심리적 상처보다 남성의 자존심이 우선시 되는 문화적 맥락의 결과이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이란 사회의 젠더 권력 구조를 비판하며, 가족 내부에서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권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에마드가 '복수'라는 선택을 정당화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 태도는, 마치 '남자답게'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에 순응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파르하디는 이러한 미묘한 권력의 균형 속에서 인간 내면의 윤리적 혼란을 부각하며, 사회적 억압이 개인의 도덕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찰하게 만든다.
욕망과 정의, 감정의 경계에서
세일즈맨에서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내면 감정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이다. 주인공 에마드는 사건 이후, 가해자를 법적 절차가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응징하려 한다. 처음에는 아내 라나를 위한 정의 실현처럼 보였던 그의 행동은 점점 복수심과 자존심 회복이라는 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어간다. 특히 가해자가 고령의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에마드는 분노를 거두지 않으며, 라나가 용서를 원해도 그의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정의’라는 개념이 얼마나 쉽게 인간의 사적 감정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에마드의 분노는 단순한 피해 회복이나 사회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위신을 지키려는 감정적 충동에 가까워 보인다. 라나의 고통과 두려움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형이지만, 에마드는 그녀의 감정보다 자신의 내면적 충족을 우선시한다. 이는 정의가 때때로 감정의 이름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춘다. 또한 관객에게 도덕적 판단의 복잡성을 고민하게 만든다. 가해자에게 죄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마드는 그를 강하게 몰아붙이며,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 장면은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행동이 실제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파르하디는 여기서 관객이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도록 설계하며, 인간의 감정과 윤리, 법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어댄다.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반영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영화 세일즈맨에서 단지 배경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주제와 캐릭터의 내면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원작 희곡 속 윌리 로먼은 자신의 꿈과 사회적 위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괴리감을 느끼며 무너지는 인물이다. 영화 속 에마드 역시 겉으로는 교양 있는 교사이자 연극배우이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다. 영화는 연극 리허설과 실제 사건이 교차되면서, 마치 두 세계가 뒤섞인 듯한 심리적 혼란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특히 연극의 대사와 에마드가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상황 사이에 교묘한 평행이 놓이는데, 이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인간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겪는 심리적 균열을 강조한다. 라나 역시 연극 속 캐릭터와 현실 속 자신의 위치를 겹쳐가며 점차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듯하다. 파르하디는 이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가 언제든 '연기'와 '진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또한 연극 속 윌리가 결국 무너지고야 마는 것처럼, 에마드도 자신이 지키려 했던 도덕성과 품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세일즈맨은 아서 밀러의 작품을 단순한 연극적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심리와 서사의 진행에 깊이 엮어내며, 인간 내면의 모순과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감을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이는 파르하디 특유의 지적 연출 방식이 돋보이는 지점으로, 관객에게 극 안의 극이라는 구조적 체험을 제공하며 영화의 깊이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