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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덩케르크, 침묵 속 생존의 미학

by nonocrazy23 2025. 5. 22.

영화 덩케르크, 침묵 속 생존의 미학
덩케르크

시간의 분할과 비선형적 전쟁 서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장르적 공식을 전복하면서도, 시간이라는 개념을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독보적인 내러티브 실험을 통해 관객에게 기존 전쟁영화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감각적 몰입과 철학적 긴장을 동시에 선사한다. 놀란은 ‘하늘(1시간)–바다(1일)–육지(1주일)’이라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간축을 설정하고, 이를 병렬적이면서도 교차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러한 구조는 서사의 순차적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응축과 지각의 중첩을 극대화함으로써,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의 시간 감각과 인식 구조에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를 시청각적으로 전달한다. 기존의 전쟁영화들이 전투의 전개, 전략의 변화, 인물의 성장이라는 선형적 시간 구도 안에서 관객에게 드라마를 제시했다면, 《덩케르크》는 시간이라는 축 자체를 장면 전환의 기준이 아니라 감각적 압축 장치로 전환시킨다. 이로 인해 관객은 서사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려 애쓰기보다, 각기 다른 시간 단위 속에서 터져 나오는 공포, 고립, 절망, 연대의 순간들을 편집의 충격과 감정의 파편들로 경험하게 된다. 놀란은 이를 통해 전쟁을 재현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의 지각에 미치는 즉각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의 응축을 체험하게 만든다. 특히 세 시간대가 교차하는 순간, 관객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던 인물들이 마치 한 장면 안에 겹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몽타주의 감각적 교란을 경험하게 되며, 그 순간 전쟁은 더 이상 시간적 진행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적·감정적 충돌 지점으로 변환된다. 이러한 시간의 중첩은 “구조적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 불일치가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혼란과 압박, 그리고 생존의 모순적 감정을 대변한다. 놀란은 이 실험을 통해 영웅 서사도, 전략적 승리도 없는 전쟁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곳에는 클라이맥스도 없고, 감정의 상승 곡선도 없다. 그 대신 시간의 반복, 중첩, 지연이 일으키는 심리적 압력이 마치 실시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전장에 서 있는 듯한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특정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편화 속에서 감정을 해체하고 다시 조직하는 이 독특한 서사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개입자의 시선이 아니라 동참자의 위치에서 전쟁을 감각적으로 ‘겪게’ 만든다. 《덩케르크》의 시간 분할 구조는 단순한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비인간적 상황이 인간의 시간 감각마저 해체시킨다는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1시간, 1일, 1주일’이라는 시간의 단위는 객관적 기준이 아닌, 생존자 각각의 감정 리듬이 지닌 상대성을 말하며, 놀란은 이를 통해 ‘진실’보다 ‘지각’, ‘이해’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감각적 서사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다. 이로써 《덩케르크》는 전쟁을 묘사한 영화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시간 구조를 시네마 언어로 구현해 낸 드문 사례로 남게 된다.

 

영웅 없는 전쟁과 침묵의 윤리

이 작품에는 이름 있는 장군도 없고, 전략을 주도하는 전쟁 영웅도 없으며, 심지어 개인의 서사가 뚜렷하게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조차 최소화되어 있다. 놀란은 명확한 주인공을 부각하기보다, 익명의 군인들을 통해 개별 인간의 고통과 생존 본능이 어떻게 집단적 공포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탐색한다. 이때 가장 인상적인 서사적 장치는 다름 아닌 ‘침묵’이다. 캐릭터들이 드러내는 감정은 대사나 설명을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침묵은 의도된 공백이자,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윤리적 장치로 기능한다. 놀란은 말로 규정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생존의 욕망을 굳이 언어로 해석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곧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철학적 입장이며, 어떤 이상이나 명분으로도 이 죽음의 풍경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감독의 태도를 반영한다. 예컨대, 병사들이 구조선에 오르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고 다시 밀려나는 반복적 장면은, 이들이 어떤 군사적 목적을 수행하기보다는 그저 살아남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드러낸다. 그 속에서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칭송받지 않고 누구도 구별되지 않는 집단적 익명성만이 강조된다. 그들이 지닌 감정은 오직 표정, 눈빛, 숨소리, 그리고 몸짓을 통해 전달되며, 이는 관객이 개입하는 방식마저도 수동적 이해가 아닌 감정의 투영과 내면화로 바뀌도록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비영웅 서사’가 오히려 더 강력한 윤리적 울림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놀란은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개인의 이야기 속에서 공허한 영웅주의를 경계하고, 인간의 감정을 조형하는 내면적 윤리를 강조한다. 이는 영화 말미,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우리가 실패한 게 아닐까?"라는 회의적 감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조차 전쟁의 명분이나 전략적 해석보다도, 그들의 내면에서 일고 있는 죄책감, 수치심,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섞인 감정의 층위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덩케르크》의 침묵은 단순히 대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대사 없이도 가능하다는 영화적 실험이다. 즉, 전쟁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을 말하고, 영웅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모든 생존자가 갖는 존재의 무게를 동등하게 전달한다. 이 침묵 속에서 놀란은 거창한 명분이나 위대한 승리보다도,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위대한 일인가를 되묻는다. 결국 《덩케르크》는 영웅의 무용담이 아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침묵의 윤리를 통해 전쟁을 증언하는 방식의 전환을 제안하는 작품이다.

 

소리와 구조: 덩케르크의 청각적 전쟁 체험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전쟁’이 아니라 ‘들리게 하는 전쟁’을 구성하며, 관객을 시각적 주체가 아니라 청각적 수신자로 전환시킨다. 한스 짐머가 설계한 사운드트랙은 단순히 음악적 감정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 긴장, 리듬,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구조적 축이 된다. 특히 그는 실제 시계 소리에서 착안한 ‘틱톡’ 리듬을 기저음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줄어드는 것’이라는 체감을 제공하며 생존을 위한 카운트다운 구조를 청각적으로 구현해낸다. 놀란은 이러한 소리의 구조를 통해 시공간의 전환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 파도, 총소리, 프로펠러의 회전음, 엔진의 진동 같은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음향을 확장된 내러티브로 사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위치 추적하게끔 만든다. 예를 들어 전투기 습격 장면에서는 전투기의 실제 위치가 화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소리의 방향성과 강도를 통해 이미 관객은 공포의 근원을 직감하고 긴장을 감정적으로 감내하게 된다. 이는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 반응하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도 직결되며, 놀란은 그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시네마를 오감의 총체적 체험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특히 한스 짐머는 ‘셰퍼드 톤(Shepard Tone)’이라는 착청 효과를 활용해 계속해서 음이 상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음향을 설계한다. 이 효과는 관객이 느끼는 긴장을 해소되지 않는 상태로 유지시키며, 결국 시간 감각과 공간 감각이 끊임없이 왜곡되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청각을 통해 전달한다. 이로써 전쟁은 ‘지금 이 순간’의 생존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가오는 공포의 반복으로 인식되며, 관객은 스크린을 ‘본다’기보다 ‘감내한다’는 감각적 몰입의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덩케르크》는 대사가 거의 없다. 이는 침묵의 윤리를 반영하는 동시에, 소리 그 자체가 대사를 대체하는 영화적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폭격기의 저주파 음향, 선박이 침몰할 때의 금속성 마찰음, 총성이 울리는 침묵의 순간들은 모두 말보다 강력한 정보 전달 수단이자 감정의 직접적 촉발 장치로 작동한다. 이러한 사운드 디자인은 영화의 서사를 보조하는 기능을 넘어서, ‘전쟁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구조’를 관객에게 직접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결국 《덩케르크》의 청각적 구성은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나 스코어 효과가 아니라, 인물들의 생존 본능, 시간의 흐름, 감정의 압박을 압축적으로 구조화하는 영화적 언어이며, 놀란은 시청각의 분리를 해체하고, 영화를 오감의 조화로 완성된 체험 예술로 변모시킨다. 관객은 음향의 리듬 속에서 스토리의 변화를 추적하게 되며, 감정의 절정을 눈보다 귀로 먼저 경험하게 되는 서사적 위치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청각적 구조의 정교함은 영화가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재구성하여 전쟁의 본질에 다가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혁신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