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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2018) “존재를 고발하는 아이”

by nonocrazy23 2025. 4. 8.

영화 가버나움(2018) “존재를 고발하는 아이”
가버나움(2018)

“자인의 시선으로 본 세계"

자인의 삶은 시작부터 부정당한 존재로 출발한다. <가버나움>은 출생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한 소년이 자신을 낳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충격적인 서사로 시작되지만, 그 충격은 곧 연민이 아닌 깊은 분노와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자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아이’로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생존을 위한 기능으로 취급받는 현실이다. 먹을 것이 없어 약을 훔치고,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며, 동생 사하르의 몸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곧 팔려갈 것을 직감한다. 그의 세계는 언어가 아닌 직감과 반사신경으로 작동하는 잔혹한 서바이벌이다. 하지만 자인의 본질은 단지 고통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이를 인식하고 거부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자인은 끊임없이 행동하고 판단하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부모에게 소리치고, 거리에서 만난 불법 체류 여성 라힐과 그녀의 아기 요나스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가장의 역할을 자처한다. 어른들 사이를 떠돌며,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세상에서 자인은 ‘아이이기를 거부한 아이’로 점점 변해간다. 하지만 이 아이는 결코 무감각하거나 무표정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요나스를 안고 거리를 헤맬 때도, 사하르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도, 울지 않는다. 그 무표정은 단순한 강인함이 아닌, 감정을 분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그 얼굴은 이미 사회적 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너무 이른 나이에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확인해야 했던 얼굴이다. 자인의 고발은 단지 부모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했나요?”라는 질문은 곧 “당신들은 나를 인간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나요?”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가 겨냥한 건 부모의 무책임이면서 동시에, 그 무책임을 가능하게 만든 제도와 사회 구조다. 교육, 복지, 법의 시스템은 모두 그를 외면했다. 법정에서 자인이 또박또박 진술하는 장면은, 피해자가 가해 구조를 응시하며 세상을 고발하는 전환의 순간이다. 자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세계는 ‘살아있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풍경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안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으며, 말한다. “내 삶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건 잘못되었다고.”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 메시지"

<가버나움>이 단지 한 아이의 비극을 다룬 영화였다면, 그것은 슬픈 이야기로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강렬한 이유는 자인의 삶을 통해 개인적 고통이 어떻게 사회 구조의 폭력과 맞닿아 있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영화는 누군가의 ‘선의’나 일회성의 감정적 구호로는 결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자인의 절망은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한 존재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기인한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행정 절차가 아니라, 자인이 법과 제도의 보호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는 존재하되, 사회적으로는 '투명 인간'이다. 이러한 상태는 라힐과 같은 불법 체류자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그녀는 자인을 거둬들이며 조용히 생계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국가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시스템의 ‘바깥’에 머물고 있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누구의 책임도 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책임의 공백을 폭로하면서, 무수히 많은 자인들이 왜 아무도 항의하지 못하고, 또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지 묻는다.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것은 그래서 법적 처벌을 기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존엄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다. 고발의 대상은 부모였지만, 진정한 청중은 관객과 사회 전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를 감정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이 자인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단순히 연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아이가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존재로 보이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지점에서 *<가버나움>*은 피해자를 연민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수많은 영화들과 선을 긋는다. 자인은 스스로 변호하고, 스스로 증언하며, 스스로 생각한다. 그는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증명하려는 행위자다. 따라서 이 영화는 사회적 고발이자 동시에 윤리적 질문이다. 우리는 태어난 모든 존재에게 최소한의 권리와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인의 말은 단지 개인적인 분노가 아닌, 모든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보편적 권리를 말하고 있다.

 

“나딘 라바키의 연출 미학"

나딘 라바키 감독은 <가버나움>을 단순한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기록에 가까운 감정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낸다. 영화는 자극적인 장면이나 음악 없이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는 감독이 철저히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인물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묘한 거리감과 친밀함의 균형을 조율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움직이며, 시종일관 자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하지만 이 시선은 결코 멜로드라마적이지 않다. 대신, 감독은 자인이 마주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더 깊이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라바키는 비전문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 시리아 난민 출신이며, 다른 출연자들도 실제로 유사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사실은 영화가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연기라기보단 삶의 재현에 가까운 이들의 퍼포먼스는 장면 하나하나에 진정성을 불어넣는다. 덕분에 관객은 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카메라가 흔들리거나 거리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통제된 세트가 아닌 현실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감독은 감정의 절정을 음악이나 연출로 과장하지 않는다. 자인의 동생이 강제 결혼을 당하고 사망하는 사건은, 정적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 처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 이 같은 절제는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더 크게 만든다. 자인이 요나스를 안고 거리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그저 '불쌍한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외면한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발버둥 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나딘 라바키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의 ‘동정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책임감’을 묻는다. 우리가 외면한 사회의 그늘에 이토록 생생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강요 없이 각인시킨다. 결국 <가버나움>은 눈물을 유도하는 영화가 아니라,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라바키는 연출의 힘이란 과장된 감정 연출이 아닌, ‘보여줘야 할 것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녀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자인의 얼굴 위에 머문다. 이 카메라의 정직함이야말로 영화가 가지는 윤리적 힘의 근원이자, 관객이 영화를 본 뒤에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