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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의 반격 선언, 영화 오션스 8

by nonocrazy23 2025. 5. 19.

여성 서사의 반격 선언, 영화 오션스 8(2018)
오션스 8

젠더 전환 서사의 전략과 한계

조지 클루니 주연의 전작 ‘오션스’ 시리즈가 구축해 온 남성 중심의 형제애와 팀플레이, 그리고 사기극의 유쾌한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여성 서사로 전환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감성과 정치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지 여성 캐릭터들로 기존 포맷을 대체하는 데 그쳤는가, 아니면 젠더적 시각에서 새로운 서사 구조를 개척했는가는 중요한 분석 지점이다먼저, 영화는 젠더 전환 자체를 서사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판 오션스’라는 외부적 타이틀과 달리, 극 중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이 점은 고전적인 ‘대표성’ 담론(즉 여성 캐릭터가 ‘여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인물 자체의 기능성과 매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접근이라 볼 수 있다.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데비 오션은 ‘형의 유산을 잇는 누이’라는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적인 범죄 설계자이자, 감정적으로 절제된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체적 기획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영화는 동시에 기존 남성 중심 서사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하이스트 장르의 전형적인 구조(목표 설정, 팀 구성, 계획 실행, 긴장감 있는 변수, 마무리의 반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장르 전환이 아닌 젠더 교체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는 ‘전복’이라기보다는 ‘복제’에 가깝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이야기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여성들이 이끄는 ‘새로움’보다는, 익숙한 서사의 안정감 안에서 머무르게 된다. 또한 ‘젠더 전환’이라는 전략이 상업성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할리우드 내에서 여성 중심 블록버스터에 대한 시장 가능성을 검증한 사례이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급진적인 서사적 실험이 가능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실제로 《오션스 8》은 전작들과 달리 사회 구조나 권력의 위계를 전복하거나 도발적으로 풍자하지 않는다. 이들은 체제의 외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체제 안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하는’ 범죄자들이며, 이는 전복보다 적응과 내재화의 전략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는 젠더적 가치는 분명하다. 단순히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관습적 시청각 문법이 바뀌며, 관객은 익숙한 서사를 새로운 감각으로 경험하게 된다. 즉, 이 영화의 진정한 전략은 서사의 혁신이 아니라, 캐스팅의 교체만으로도 ‘감정적 지형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션스 8》은 완성된 젠더 전환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젠더 감각이 기존 장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적 스케치에 가깝다. 이 영화가 보여준 것은 전복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개방이며, 하이스트 무비라는 장르가 이제 더 이상 남성만의 무대가 아님을 선언한 하나의 이정표다.

 

스타 캐스팅과 인물 간 합의의 힘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데비 오션은 조지 클루니의 대니 오션과 유사한 전략가적 지위를 계승하지만, 그 캐릭터성은 훨씬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감정 노출에 인색한 방식으로 조율된다. 그녀는 팀 전체의 방향을 설계하고, 인물들 간의 긴장을 조율하는 서사의 중추이자 감정적 중력장으로 기능한다. 반면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루는 데비의 오래된 동료이자, 사실상 유일하게 그녀를 제어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며, 이 둘의 관계는 우정인지, 권력의 균형인지, 혹은 감정의 여백인지 모호한 지점에서 지속적으로 진동한다.이러한 이중 축의 중심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다프네 클루거는 매우 흥미로운 존재로 자리 잡는다. 처음에는 표면적 희생자 혹은 타깃처럼 보이지만, 중반 이후에는 서사의 전환점에서 관찰자에서 공모자로 이동하는 서사적 반전을 부여받는다. 앤 해서웨이는 이중적인 감정의 레이어(즉 허영과 취약함, 통제력과 외로움)를 기민하게 표현함으로써, 캐릭터의 매력을 단순한 ‘유명 인플루언서’의 외피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서게 한다. 그녀의 연기는 전형적 ‘팜므파탈’ 이미지에서 벗어나, 가부장적 시선에 조련된 여성 이미지의 자가 해체를 시도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인물들이 단순히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합의(말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조율되는 감정적 균형)이 서사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기존 하이스트 영화들이 종종 팀워크를 '갈등과 통제'의 구조로 설정했다면, 《오션스 8》은 ‘신뢰와 자율’의 방식으로 이를 대체한다. 인물 간 갈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일부에겐 서사의 긴장 부족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오히려 여성 집단의 관계가 충돌 중심 서사로만 구성된다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선택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연출의 산물이라기보다, 배우들의 연기적 ‘화음’이 만들어낸 에너지로 보인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괴짜 같은 리듬은 민디 캘링의 직선적 대사 처리와 대비되어 장면마다 템포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가수 리한나는 배우로서 최소한의 동작과 말로도 극의 리듬을 지키는 ‘절제된 무게’를 부여한다. 각 캐릭터는 결코 서로를 압도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합의의 힘’이며, 그 힘은 단순한 협업 이상의 신뢰에 기반한 공존의 미학이다. 결론적으로, 《오션스 8》은 스타 캐스팅을 단지 상업적 도구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성과 캐릭터성을 정교하게 정렬함으로써, 하이스트 무비라는 장르가 지닌 플롯의 기계적 긴장을 대신해, 인물 간 에너지의 흐름 자체를 새로운 서사적 긴장감으로 변환시킨다. 이 영화에서 진짜 절도는 다이아몬드가 아닌, 카리스마와 신뢰, 그리고 배우들 간의 ‘감정적 설득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성 범죄영화의 문화적 의미와 진보성

《오션스 8》은 범죄 장르의 문법 안에서, 여성 인물들이 주도하는 ‘성공적인 작전’을 그린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영화다. 기존의 범죄영화, 특히 하이스트 무비가 대개 남성의 리더십, 기술력, 형제애, 또는 반항적 남성성에 의존해왔던 반면, 이 영화는 범죄 수행의 기획, 실행, 완성까지 전 과정을 여성 주체들이 독립적으로 주도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이는 단순한 성별 교체에 그치지 않고, 범죄 장르가 어떤 방식으로 성별화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범죄영화에서 여성은 주로 ‘유혹자(femme fatale)’, ‘희생자’, 혹은 ‘정의로운 경찰’로서 소비되어왔다. 그러나 《오션스 8》은 여성이 범죄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상상력을 정당하게 실현한다. 이들은 체제를 교란하는 외부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정의’를 말하지 않고, ‘복수’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들의 능력과 욕망을 실행에 옮긴다. 이러한 중립적이며 냉정한 윤리적 입장은 오히려 남성 중심 범죄 영화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기존 서사를 비틀고 전복한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기존 ‘오션스’ 시리즈의 세계관과 명시적으로 연결되면서도, 그 유산을 계승하기보다는 경쾌하게 밀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데비 오션은 전 시리즈 주인공 대니 오션의 여동생으로 소개되지만, 그의 그림자 아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남성 중심 서사의 유산을 ‘의미 없이 죽어버린 형’이라는 장치로 뒤로 밀어 두고, 새로운 팀, 새로운 규칙, 새로운 에너지로 사건을 주도한다. 이 전환은 ‘계승’이라는 안전한 서사 구조를 거부하며, 독립성과 주체성의 상징적 선언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 영화는 여성들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션스 8의 주인공들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과 능력, 실행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이는 '여성이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된 서사 규범을 거부하며, 여성 캐릭터를 ‘설명되어야 하는 타자’에서 ‘서사를 주도하는 자’로 전환하는 결정적 방식이다. 이 같은 윤리적 중립성은, 여성 주체를 해방된 존재로 설정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여성 중심 서사가 아직도 감정 중심, 희생 중심, 혹은 타인을 돕는 조력자로 소비되는 한국이나 할리우드 주류 영화 흐름 속에서 현저히 다른 진보성을 보여준다. 《오션스 8》은 여성들끼리의 경쟁이나 파괴가 아닌, 공모와 협력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가는 서사를 채택하며, ‘서로를 해치지 않고도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집단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여성 서사가 흔히 선택해 온 피해서사 또는 감정 중심 드라마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전략적인 여성상의 모델을 새롭게 제시하는 지점이다.